'최초의 자동차를 발명한 사람'은 누구인지에 대해 사람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는 자주차(태엽차)를 만든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라는 의견도 있고(이전 포스팅 참고), 1765년 무거운 대포를 움직일 목적으로 바퀴가 3개 달린 증기자동차 2대를 만든 니콜라스 조셉 퀴뇨(Nicolas Joseph Cugnot, 프랑스의 군사 기술자)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사람이 탈 수 있는 승용차를 최초로 만든 영국의 젊은 광산 기술자 리차드 트레비딕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정식 라이선스를 최초로 부여받은 자동차를 발명한 카를 프리드리히 벤츠(Karl Friedrich Benz)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장 공식적이면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최초의 자동차는 '니콜라스 조셉 퀴뇨'가 만든 '삼륜 증기자동차'라는 것입니다.
1769년, 프랑스의 공병 대위였던 니콜라스 조셉 퀴뇨. 그는 무거운 대포를 옮기기에는 병사들의 힘이 아까웠고, 어떻게 하면 힘을 들이지 않고 무거운 대포를 옮길 수 있을지 골똘히 생각합니다. 벨기에에서 파병중이었던 퀴뇨는 영국에 있는 제임스 와트(James Watt)의 증기기관 발명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이를 응용하여 자동수레 설계를 시작한 제임스 와트. 여기에 당시 프랑스 육군 사령관이었던 스와솔(Choiseoul)이 퀴뇨의 작업을 후원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1769년, 퀴뇨의 발명 착수 6개월만에 공식적인 세계 최초의 자동차인 무거운 엔진을 단 증기 기관 삼륜 자동차를 만들었습니다. (발명 당시 명칭은 '스스로 달리는 기계' 또는 '말 없는 마차'였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자동차가 등장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완성된 증기자동차를 둘러보던 후원자 스와솔 공작은 조셉 퀴뇨에게 시험운전을 하라고 명령합니다. 당시로선 무모하고 괴짜같은 발명을 기꺼이 후원해준 후원자로서 당연한 요구였습니다. 그렇게 파리 시내를 달리게 된 증기자동차를 보기 위해 많은 시민들과 육군 장교들이 구경을 하러 옵니다. 그렇게 파리 시내를 횡보하던 중, 퀴뇨의 증기자동차는 길모퉁이에서 회전을 하다가 제대로 돌지 못해 건물 벽을 들이받게 됩니다. 제동장치도 상태가 엉망이었고 차체의 균형도 불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크고 육중한 괴물을 바라보던 프랑스 육군 장교들은 넋이 나가고, 스와솔은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퀴뇨는 파리 시민들에게 겁을 준 죄로 감옥에 갇힙니다. 미래의 믿을 수 없는 자동차시장의 도약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모든 것이 극적이었습니다.
증기자동차는 최고시속 4.8 km/h (약간 빠른 걸음)였습니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4톤이 넘는 포차를 끄는 힘은 엄청났고, 파리 시내 시험주행은 엄청난 구경거리였다고 합니다.
퀴뇨가 고안해낸 증기자동차의 구조를 잠시 살펴보자면, 사실 구조 자체는 꽤나 간단했습니다. 앞바퀴 하나와 뒷바퀴 두 개를 가진 삼륜차였으며, 조향 기능(진행 방향을 조절하는 운전장치.)을 갖춘 앞바퀴 쪽에 증기 엔진을 달아 거기에서 나온 힘으로 앞바퀴를 굴렸습니다. 2015년에 한창 유행한 전륜구동자동차의 효시로도 유명한 구조입니다.
감옥에서 2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낸 퀴노는 1771년 석방되자마자 증기자동차를 한 대 더 만들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증기 자동차에 대한 애착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퀴뇨가 만든 괴물기계라는 증기자동차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변함이 없었고 결국 그는 유럽 곳곳을 떠돌다가 1804년 객사합니다. 분명 위대한 발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발명으로 인해 반평생을 악평에 시달린 조셉 퀴뇨는 그토록 자동차에 매달렸던 것을 보면 그는 이미 자동차 시장의 엄청난 성장을 점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지금까지도 성장중인 일류 명품 자동차 브랜드를 만든 두 거인 칼 프리드리히 벤츠(Karl Friedrich Benz)와 고틀리프 다임러(Gottlieb Daimler)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